본문 바로가기
영화문화생활

영화 오펜하이머 실화 주인공, 오펜하이머의 감정상태

by 와르디아 2023. 8. 21.

물리학자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영화, 오펜하이머는 실화 영화로 알려져있지요.

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 개발에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오펜하이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오펜하이머의 출생과 어린시절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부유한 독일 이민자 줄리어스 오펜하이머였고, 어머니는 화가이자 성공한 독일 이민자 가정의 딸 엘라 프리드먼이었지요.

 

오펜하이머는 영어, 프랑스어 문학, 광물학 등에 관심이 있는 다재다능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줄리어스 오펜하이머는 섬유회사 10년 재직 결과 임원이 되었고 큰 돈을 벌어들이며, 오펜하이머 가는 흔히말하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던 오펜하이머는 부모에게 그 잠재력을 인정받고 그런 관심사를 키울 수 있는 자원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오펜하이머의 하버드대학 입학

오펜하이머는 18세에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화학 전공이지만 역사, 문학, 철학, 수학공부도 했고 학기마다 6과목씩 수강하면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 

3년 뒤인 1925년 예술학사를 최우수생으로 졸업했다고 하네요.

1927년에는 23세의 나이로 철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고 합니다.

또한, 양자역학의 분야에서 12개 이상의 논문도 발표했다네요.

 

가장 유명한 논문은 분자의 수학적 처리에서 전자 운동과 핵 운동을 분리하여 계산을 단순화하기 위해 핵 운동을 무시할 수 있는 Born-Oppenheimer 근사법에 관한 논문이라고 합니다.

 

 

 

오펜하이머의 정치 관심

20대 초까지만 해도 오펜하이머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신문이나 대중잡지같은 미디어를 좋아하지도 않아서, 1929년 월스트리트 추락사고가 발생했다는 것도 그 6개월이 지나서야 알게되었다고 해요. 
또, 1936년까지 대통령선거에 투표해본 적이 없다고도 하죠.

 

후에 1942년 맨해든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도 정치적인 이유보다는 오로지 원자폭탄을 연구할 수 있는 물리학자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반응형

 

 

맨해튼 프로젝트

오펜하이머 증명사진 (로스 알라모스)

 

1941년 10월 9일,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두달 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극비리에 원자 폭탄 개발을 위한 충돌 프로그램을 승인했습니다.

10월 21일 오펜하이머를 이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고, '급속 중성자'의 연구를 맡겼죠.

미국 육군의 그로브스 책임자는 곧 오펜하이머를 프로젝트의 비밀 무기 연구소장으로 임명했는데, 오펜하이머가 노벨상을 수상하거나 권위가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오펜하이머는 많은 사람을 리더라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행정적인 요소와 이론적이고 실험적인 연구들을 지시하면서 열정과 책임감을 보였다고 합니다.

 

1945년 7월 16일, 로스앨러모스에서의 맨해튼 프로젝트는 세계 최초의 핵 무기 실험의 절정에 달했습니다.

핵 장치의 첫번째 폭발, 트리니티 테스트를 앞두고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짊어진 오펜하이머는 숨도 쉴 수 없이 긴장했다고 합니다. 핵 실험은 엄청난 빛과 굉음으로 폭발을 일으켰고, 오펜하이머는 그제서야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고 합니다.

 

트리니티 테스트 핵실험

 

 

그러나 8월 17일, 오펜하이머는 전쟁 장관 헨리 L. 스팀슨에게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핵무기 금지를 바라는 바램을 담은 편지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스 알라모스의 감독으로 봉사한 공로 메달을 받은 것은 1946년 이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폭격 이후, 대중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되었고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유형의 기술 권력을 상징하는 국가 과학 대변인이 되어있었습니다.

Time지 잡지 표지로도 등장하기도 했지요.

 

그 당시 많은 국가들이 핵 물리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펜하이머의 감정 추론

오펜하이머는 최초의 원자폭탄을 개발을 목적으로 한, 미국 정부의 비밀 연구 프로그램인 맨하탄 프로젝트의 리더로서,

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다양한 과학자, 기술자들의 노력을 조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리더십과 지도는 핵분열을 위해 필요한 도구적인 지식을 한데 모으고 리더로서 수 많은 선택을 하는 것이었죠.

우리는 이 시기의 오펜하이머의 다양한 감정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애국심과 의무

오펜하이머는 나치 독일 이전에 전쟁의 위험과 원자폭탄 개발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의무감과 애국심은 그가 그러한 강력한 무기를 만드는 것을 둘러싼 도덕적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프로젝트에 완전히 전념하도록 이끌었을 것입니다.

과학적 호기심

오펜하이머는 뛰어난 과학자였고, 원자폭탄에 필요한 복잡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도전은 그에게 아주 흥미로운 요소였을 것입니다. 이론적 지식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했을 것 입니다.

윤리적 우려

그가 이 프로젝트에 전념하는 동안, 오펜하이머는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드는 것의 윤리적 의미에 대해서도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는 폭탄의 성공적인 실험을 목격하고 Bhagavad Gita를 인용하여 "이제 나는 세계의 파괴자인 죽음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파괴적인 힘을 발휘한 것에 대한 깊은 책임감과 후회를 하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압박과 스트레스

맨하탄 프로젝트를 이끄는 것은 엄청난 책임이 따랐을테고, 오펜하이머는 다양한 방향에서 엄청난 압박에 시달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엄격한 마감 시간이 있었을것이고, 주변의 수 많은 능력자들 사이에서 의견을 조정해야했지요. 또, 모든 것은 철저히 비밀로 행해져야했기에, 다양한 압박들이 오펜하이머에게 스트레스와 불안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혼합된 감정

이 기간 동안 오펜하이머의 감정은 과학적 성과에 대한 자부심, 폭탄 사용의 결과에 대한 우려, 그리고 폭탄 개발에 대한 개인적인 깊은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웠을 것으로 상상됩니다.

 

-

오펜하이머의 중요한 업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원자폭탄 개발에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애국심과 과학적 호기심에서부터 윤리적 우려, 그리고 그가 창조하는 파괴력에 대한 책임의 무게에 이르기까지..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을까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 영화를 보면서 그의 감정에 대해 추론해보면 좋겠습니다.